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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음악

작곡가로서 바라보는 작곡에 대한 정의

by 철학하는 광대 2018. 4. 4.

작곡가로서 바라보는 작곡에 대한 정의.


인생이 그러하듯 음악은 시간 자체를 소리로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단어를 골라 언어로 표현할 필요는 없을지 모르겠지만, 작곡가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서술을 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고 또한 그 자체를 즐기는 것 같다(그래서 지금 마감기한을 넘겨 곡을 쓰면서도 이런 글을 마감을 제쳐두고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작곡이란 개념을 접하고 오선지로 악보를 그리기 시작한지 약 17년차인 작곡가로서 작곡에 대한 개인적인 정의를 내리려고 하면, 그동안의 경험들을 풀어낼 수 밖에 없는데, 크게 이야기하자면, 이론과 모방을 하던 시기를 포함하여 2012년까지, 11년차 작곡가로서의 삶에 단 한곡도 완성하지 못한 해가 되려 전환점을 맞아주었다고 할 수 있다. 슬럼프를 맞이한 이유가 바로 작곡가로서 작곡에 대한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오선지에 곡을 쓰기 시작한 이후 약 11년동안은 군주제Monarchy와 다름없는 화성학이라는 어떠한 커다란 지배 안에서 소리와 그 소리가 이끌어져가는 힘에 의해서만 곡을 썼다. 마치 색깔을 의미없이 눈으로만 바라보는 것과 같이 그저 귀라는 감각놀이에 빠져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서랍에 넣어두고 본인만 예쁘다고 바라보는 그런 장식품을 곡으로 써왔던 것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작곡가로서 청중과 소통한다는 진부적이지만 중요한 포인트를 놓치고 있었고, 그저 본인의 만족을 위해서 곡을 썼었다. 물론, 그 자체로도 하나의 미학이며 작곡가로서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다만, 왜 곡을 쓰고 있냐는 질문에 스스로 만족할만한 답을 낼 수가 없었다. 거기서 의구심은 시작되었다.

1년간의 슬럼프 아닌 슬럼프 뒤에, 첫번째 현악 4중주를 완성했는데, 어느 전환점이 되는 곡이었음에 6년이 지나가는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현악 4중주의 의미를 되새겼고, 숫자 4에 대한 개념을 인지하기 시작했고, 그 질문을 곡에 던졌다. 곡에 관한 설명으로는 단 한줄로 충분했다. “4개의 심장이 하나의 몸으로 녹아든다.” 정말 진부하기 짝이 없고 오그라들기까지 하는 문장이지만, 그보다 더 나은 설명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 시기 이후에 작곡이란, 소리에 관한 작곡가로서의 질문을 곡에 담는 것이 작곡이라 생각했다. 리듬에 관한 의미, 소리 자체에 관한 의미들, 그리고 그 안의 크고 작은 구조들.

그러나 이 '음악에 관한 음악'도 얼마 채 가지 못했다. 2014년에 청각장애인을 위한 곡을 위촉 받았는데, 그 때는 정말 어떻게 해야하나 엄두를 못냈었고, 그 와중에 세상에 이렇게 건강한 사람이 없다고 믿었던 내 자신의 건강이 무너져 바닥을 기게 되었다. 하루가 힘들 정도로 몸이 아플 때도 있었고, 몸이 아픈게 화가 나 눈물만 나던 때도 있었다. 그래도 그 와중에 곡은 써서 공연은 올렸다.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하는 이들에게 줄 수 있는 작곡가로서의 선물은 과연 어떤 것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게 현악 4중주와는 또 다른 전환점이었다. 당시에 본인이 아팠기 때문에, 그만큼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아쉬웠지만 결과적으로는 생각해볼 큰 계기가 되었다.

그 다음부터는 시간에 걸쳐서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관계라든지, 지휘자와 음악의 관계라든지. 그 중간에 다시 '음악에 대한 음악'으로 돌아와, ordinario라는 음악용어의 개념에 재질문을 던지는 곡을 쓰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지금 안착한, 작곡가로서 내리는 작곡에 대한 정의는, 인생과 같이 ''라는 본인을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것이다. 작곡가가 곡을 쓰는 그 순간은, 그 순간에 가지고 있는 흥미와 관심을, 그리고 생각하는 방식을 고스란히 오선지에 담고 있는 것이다.

한 심리치료사와 대화를 하는 도중, 한 숙제(?)를 받은 적이 있다. 24시간을 온전히 내 몸에 집중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지내는 것.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그 먹고 싶은 대상을 찾아 먹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지금 이 순간, 내 몸이 나를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를 주시해보는 것. 평상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매 순간을 놓치고 살아가면서 살고 있는지(물론 그 매 순간을 인지하고 살아간다면 아마 며칠가지 못해 죽음을 맞이하지 않을까 싶다). 작곡도 그와 다르지 않다. 내가 느끼는 시간에 대한 인지를, 그 에너지를 현재 가지고 있는 관심에 대상을 포함하여 곡에 담는 것이다. 마치 지금 내가 내 인생을 주체적으로 끌어가듯이. 예술하는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본인의 삶에 누구보다도 주체적으로 집중하고 끌어나아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현재의 내가 곡을 쓴다는 것은, 내가 관심있는 대상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시하고 그 관찰을 통해 또 다른 새로운 모습을, 나를 통해 세상 밖으로 내보내는 작업인 것이다. 그 관심의 대상이라는게 사람마다 너무 격차가 커서, 정말 재미없고 부질없어 보이는 것도 많고, 반대로 그 아이디어 자체는 굉장히 흥미로운데 지식이 없거나 기술이 없어서 밖으로 내보이는게 어려워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 매치가 딱 맞아떨어질 때의 작품성은 누구나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 Diagnose시리즈 작품을 시작하면서 인생 처음으로 첫 시리즈를 써보는데, 세상에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제목을 못 정하고 있다가 샤워하면서 문득 생각이 났는데, 이렇게 세상이 재미있을 줄이야. 마감이 힘들고 곡 수정은 더 싫어하면서도 다시 곡을 쓰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곡을 쓴다는 것은, 지금 내 인생을 하루하루 꾸려나아가는 것과 다름없이 ''라는 인생을 오선지에 써내려가고 있다는 의미다. 그것이, 작곡가로서 본인의 작품을 볼 때 발가벗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다.

다만, 그렇게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면, 곡을 쓰려면 해야하는 것이 그 누구보다도 세상을 관심있게 바라보고 집중하며, 공부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번에 청진기를 사서 심장소리를 공부했던 것처럼, 끊임없이 여러 대상을 공부하는 수 밖에. 그리고 '수 밖에'라는 표현이 아닌, 그 관심이 무궁무진하고 재미있어서 그만둘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곡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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