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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음악

듣는다는 것에 관하여/청중의 입장에서

by 철학하는 광대 2019. 12. 1.

(독일 쾰른에서 2번째로 열린, 3일간의 WERFT 현대음악 페스티발을 다녀온 후, 멈춰버린 것만 같은 현대음악의 현 상태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직 정리가 되지 않고, 스스로도 정립(!)하지 못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쓰고자 했던 이야기부터 작성하고자 한다.)

 

청중의 입장에서 어떤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작곡가의 곡 그 자체뿐만 아니라 지휘자와 연주자들의 공연,그리고 연주회가 이루어진 시간과 장소에 청중은 큰 영향을 받는다. 이것은 청중의 입장에서 보면 수동적인 것들로 청중이 주체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닌, 수용하게 되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듣는 사람은 주체적으로도 본인의 영향을 받는다(!).즉, 그 날 그 시간 그 장소에서 느껴지는 몸의 컨디션이라든가 혹은 살면서 여태까지 들었던 혹은 교육받았던 혹은 경험했던 것에서부터 청중은 각자 '다르게 듣기'를 하고 있다.청중의 '듣기'는 연주자의 '연주'만큼이나 살아 숨쉬는 것으로 컨디션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작곡가이자 현직 교수인 Claus-Steffen Mahnkopf의<Über das Hören>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다음은 내용 축약이며, 번역이 아니다.

 

'귀는 수동적이다. 눈처럼 단 한 번 감을 수도 없어서 중단할 줄을 모른다. 우리는 자는 동안에도 '듣고'있으며, 귀는 그 주변 전체를 쉼 없이 인식한다. 눈에 보이지 못하는 것 또한 들을 수 있다. / 이렇게 수동적인 상태는 그만큼의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귀의 반응은 섬세하고,빠르다. 언어는 그 안에 단어적인 의미 뿐만 아니라 아우라, 그리고 그 말에서 오는 감정까지 담고 있는데 우리는 '듣기'를 통해 이 많은 것들을 한 번에 파악할 수 있다.'

 

물리적으로만 봐도 듣기는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사방의 소리를 살아 숨 쉬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듣는다.잠에서 깰 때조차 수 많은 사람들이 알람으로, 청각을 깨우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그러나Mahnkopf 의 글처럼,우리는 더 많은 것을 파악한다.그것은 비단 언어에서만이 아니다. 연주회에서는 훨씬 더 섬세하게, 많은 것들을 인지한다. 최대한 청각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연주회에서 오로지 소리에 집중하게 되는 그 순간에는 과연 어떨까.

 

우리는 평상시에 운전하면서 혹은 카페에서, 배경같이 음악을 접하고 있다. 외과 수술하는 있는 의사들이 수술실에서도 음악을 틀기도 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어딘가를 걸어가는 도중에도 이어폰이나 헤드폰으로 무언가를 듣는다. 이는 전부 어떤 일을 하면서 이 수동적인 기관이 계속 무언가를 인지하도록 하는 어떤 행위이다. 그러나 오로지 청각에만 집중하게 될 때는 다르다. 

연주회에서는 지금 연주되는 음악 뿐만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 가끔 어딘가 가려워 긁기도 하고, 오랜 시간 앉아 있어 불편함에 꼬았던 다리의 방향을 바꾸는 행위에서 오는 진동들이 귀에 의해 인지되기도 한다.아주 미세한 소리까지 우리는'듣고' 있다. '무대 위의 소리에 집중하면 안 들린다'고 이야기한다면 물론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귀는 그 작은 소리까지 이미 '듣고'있으며, 청각에 집중할 수록 이 소리는 더욱 더 크게 느껴진다.공연 중 청중에서 고요가 이루어질 때, 아주 작은 무대의 소리가 저 뒷자리까지 닿을 때 희열이 오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마치 폭력과도 같아 소름이 돋는 순간이면서도 아름다움에 몸서리 치게 되는 순간. 다른 사람들의 귀도 이렇게 집중되어있구나 느끼는 그런 순간이 있다. 자신의 옆에 누가 앉아있느냐에 따라 변하는 소리.

물리적으로 이런 다양한 소리들은 외부에서 접하는 것들이고,그 외 듣는 사람의 머리에서는 또 다른 작용이 일어나고 있다, 마치 한 사람이 이야기한 것에서 그 사람의 감정을 파악하는 것과 같은. 어떻게 파악되는 것일까.

한 사람은 평생 자신의 인생 밖에 살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같은 음악을 듣고 어떻게 인지하고 반응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다르다는 사실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 즉,연주회장에 처음 가본 사람이 경험하는 것과 매일 연주회를 방문하는 사람이 듣는 방식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적용될 만한 공통되는 한 가지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경험의 유무이다. 딱 두가지로 나누어 본다면, 그 첫 번째는 곡을 이미 들어본 적이 있어서 흥얼거릴 수 있는 정도일 때,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곡을 전혀 모를 때이다. 물론 모른다는 것에는 이미 들었는데 기억이 안 나는 것도 포함이다. 현대음악의 접근성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대부분의 곡들이 후자에 속한다. 이는 듣기를 넘어선 뇌에 각인된 경험과 인지방식으로 이야기가 넘어가게 된다. 누군가의 말에서 감정을 파악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소리를 들었을 때 이런 감정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교육받고 사회적으로 성장하며 인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아는' 것이다.곡을 안다는 것도 비슷하다.기억할 수 있는 곡을 들었을 때는 숨과 몸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귀의 근육도 그에 반응하여 움직인다. 이는 길을 걸을 때 목적지가 어딘인지 알고 걷는 것과 같다.비록 길이 런닝머신처럼 자동으로 움직여서 나를 걸어가게끔 만들기 때문에 능동적 걷기를 해야 도달하는 건 아니지만, 대략 어떤 곳으로 도착할 것인지 알기 때문에 그 런닝머신의 움직임을 파악하며 몸을 맡길 수 있다. 그러나 전혀 모르는 곡은 그것이 어렵다. 클래식의 경우 일종의 정립된 규칙들 때문에 아주 조금은 바닥이 어떻게 생긴 건지 이해할 수 있지만, 현대음악은 그렇지 않다. 물론 현대음악 중에도 많이 듣다보면 비스무레한 바닥을 발견할 수 있다. 한 작곡가의 음악을 여러 번 듣게 될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생판 처음 들어보는 소리를 연주회장에서 접한다는 것은 얼마나 걸리는지도 모르는 곳으로, 바닥도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데 그에 몸을 맡기는 행위와 같다. 어떤 속도로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모르는데 몸을 맡겨서 어딘가에 도착하길 바라는, 일종의 모험이다.이 모험을 즐기면 초연을 듣는 것에 재미를 많이 느낄 수 있지만, 그 길이 지루하거나 너무 빙빙돌아 어지럽거나 혹은 도착한 장소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재미가 없을 수 밖에 없다. 재미를 떠나 가끔 화가 나기도 하고 왜 굳이 이 장소에서 이 시간에 여기에 있었는지 한탄하게 되기도 한다. 즉,알고 있는 곡을 '다시'듣게 될 때는 목적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귀는 더 여유를 가지지만, 모르는 곡을 들을 때는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귀도 뇌도 방향성을 잃은 상태가 된다. 귀는 끊임없이 진동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뇌는 어디로 가야하는지 그 길을 모색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 때 어떤  끊임없이 모르는 상태여야 미를 느, 어떤  몰랐지만 가다보니 어 디로  것 같은지 알아내고 도착점 으면 아하기도 한다. 혹은, 어떤 인지는 알아내 어도 도착점은 전혀 색다른 길 바라기도 한다.  을 때와 마찬가지다. 반전을 기 대하기도 하고, 혹은 상한 말이 들어맞길 기대하기도 한다. 각자 다른 배경에서 다른 방 식으로 성장해 다른 진동을 경험했기 때문에 같을 수 없는 '듣기'인 것이다.

 

듣는 방식은 모두 다르며 앞으로도 다를 것이다.본인의 성향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할 것은 귀는 우리가 숨 쉬고 있는 내내 주변의 모든 것들을 아주 열심히 심장처럼 일하고 있다는 것.그 작은 근육 하나하나 일하면서 뇌로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것.

 

- 무언가 결론을 지어야할 것 같은 생각(강박!)이 들었지만, 그냥 그런 생각들이 머리에서 움직이고 있음으로끝을 낸다.

 

2019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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