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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대한 집착

획일화, 그리고 가벼움

by 철학하는 광대 2020. 11. 19.

무엇을 공부한다는 표현은 과거의 것을 익히고 이해하는 것에 가깝다. 대부분은 누군가 정립해놓은 것을 받아들인다. 이것은 현재의 삶을 다른 방식으로 인지하게 해 주며 동시에, 미래를 그리는 바탕이 된다.

 

오랜 기간 공부하면서 자주 질문하는 것이 있다. 왜 현재에는 이전보다 천재라 하는 사람들이 적은 걸까.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줄어드는 것일까. 분명 역사 안에서 물질적인 풍요는 증가하고 있는데 어딘가 멈춰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은 우리가 흘러가는 시간 속에 있기 때문일까.

 

우리는 모두 언제가부터 정해진 규율 안에서 살고 있다. 교육에 관한 체계는 더욱 그러하다. 어느 나라 어느 곳 할 것 없이 학교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정해진 커리큘럼으로 누군가가 정리해 놓은 내용을 배운다. 심지어 그것을 언제 배울지 그 시간조차 시간표에 따라 정해진다.우리는 마치 복제를 하듯 사회 안에서 만들어진다. 그 속에 서로 다른 작은 차이는 분명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는 틀 안에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일률적이다. 획일화 되어 간다. 

같은 세대 안에서 무언가를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은 사람들을 모으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며, 그러한 감정은 유대감을 낳기도 한다. 이는 다수가 모여서 해내야하는 일이 있을 때 크나큰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사회가 획일화 되어갈 수록 개인이 가지는 소외감은 증가하며 또한 개별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하는 부분에선 발전이 더디어진다. 그 뿐만이 아니다. 획일화 될 수록 계급의 차이는 더욱 극심해진다. 같은 내용을 같은 선생님께 같은 방식으로 배운 이후 치른 시험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많은 답을 맞추고 누군가는 그렇지 못하다. 물론 능력의 차이로 지불에 차등을 둔다든가 하는 것은 생산력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또한 커다란 사회를 이끌어가기 위해 체계는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획일화되어가는 사회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그 안에서 본인의 능력을 꽃 피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찌해야하며, 획일화되어 더뎌지는 사회의 발전은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이와 동시에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가벼움이다이 가볍다는 표현은, 무언가를 수동적으로 인지하며 그 시간조차 짧아진 상태를 의미한다. 어떤 대상에 대해 오랫동안 곱씹어 자발적으로 생각해볼 시간이 없다는 이야기다. 생산이 아닌 소비하는 입장으로,다른 것을 망각하기 위한 순간의 도피를 즐기며,개개인의 것들이 만연해져 하나의 사회 현상이 되었다.

삶의 속도가 빨라졌다는 것이 하나의 원인일 것이다.육체가 따라가지 못하는 정신적 피로는 가벼움을 통해 이완되기도 한다. 개인의 삶이 중요시 된 21세기에는 더더욱 이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주객이 전도되어 도피가 어느 새 주인의 자리를 차지했다. 가벼움이 남용된다. 이완할 시간이 아닌데 이완하고 있는 상황이다. 장시간동안 주체적으로 끌어가야 이루어지는 것들에 발전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상황들이 벌어진다. 이 가벼움으로 정보의 쓰레기가 쏟아지고 이로 인한 2차 피로가 야기된다. 너도 나도 진실되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현혹되고, 너도 나도 다른 것이 더 중요함을 알면서도 귀중한 시간을 매몰차게 버린다. 현 사회다.

 

점점 줄어가는, 혹은 이미 사라 없어진 영웅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나보고 직접 영웅이 되라고 한다.

획일화되고 가벼워지는 사회 안에서 본인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 만은 없다.무언가를 변화시키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한다. 그것이 획일화된 가벼움 속에서 우리가 해야만 하는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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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음악 사회에 빗대어 이야기 해보자. 밖에서 보면 학교라는 교실을 떠나 개인 레슨이라는 농후하고 집중된 시간을 통해 각각의 음악을 키워가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그렇기만 할까. 그에 관한 좋은 예시들도 분명 존재하지만, 예중 예고 음대 콩쿨만 봐도 확일화된 형태가 확연하게 드러난다(한국 사회가 더 심각한 것은 사실이나,이는 우리나라에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본인이 가진 예술성보다 틀에 맞춰진 규율이 중요해지고 예술성 또한 일률적으로 변화한다. 본인을 찾아가는 여정을 예술에 담는 것이 아니라,사회 안에서의 규율에 본인을 끼워맞춘다.오케스트라 자리 혹은 강사, 교수가 최종 목표가 되고 그것을 이루고 나면 남은 생은 여태 쌓아온 것들을 이용하면서 살아간다. 더 이상의 발전은 없다. 자아를 찾기 위한 시간조차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그런 사회인 것도 사실이나 바꾸거나 노력하고자 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끊임없이 발전해 나아가며 쌓아가는 것이 유일무이하고 완벽한 답은 아니지만, 적어도 예술은 그런 시도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무르익지 않을까. 너도 나도 똑같은 레파토리에 너도 나도 똑같은 주법으로 기술을 익힌다. 그 또한 박수쳐야할 대단한 일이지만, 보면 볼 수록 아쉬움이 가득하다. 물론 모두가 그럴 순 없겠지만, 연주가 끝나고 집에 가서 맥주를 마시고 TV쇼를 보며 감자칩을 먹는 그런 꿈을 꾸기보다 지금 무대 위에 그 살아있는 시간에 전념하기를 바라기에는 너무 고단한 삶, 살아가기 힘든 사회가 되어버린 걸까.

미디어도 마찬가지이다. 유투브의 조회수를 보면, 음악을 도구로 쓴 단순하고 자극적인 놀이 혹은 주제가 몇 주만에 몇십만, 몇백만 조회수로 치닫는가 하면 몇년 된 좋은 영상은 아직도 몇천명 밖에 조회하지 않았다. 가벼운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이런 면을 엘리트주의라고 한다면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가벼운 것은 그만큼 짧고 가벼울 수 밖에 없다. 지속되지 않으며 발전적이지 않고 나아가지 않는다. 일회성이다. 인지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다. 발전적으로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큰 것을 바라고 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또한 하나의 방법일 것이지만 모든 사회가 그렇게 변화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그것은 무대 위에서 음악을 하는 우리가 앞장서서 해결해야할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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