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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음악사회

현대예술과 폭력성

by 철학하는 광대 2018. 10. 12.

폭력(暴力). 네이버 국어사전에 의하면,


명사

남을 거칠고 사납게 제압할 에 쓰는주먹이나  또는 몽둥이 따위의 수단이나 넓은 으로는 무기로 억누르는 을 이르기도 한다.


    라고 적혀있다. 


    아방가르드Avant-garde라는 방패 안에서 무엇이든 해도 될 것만 같은 현대 예술안에서의 시도는 21세기가 들어서 격해졌다 무디어졌다를 반복하고 있다. 그 와중에 공연을 가다보면 간질환자나 노약자는 참석을 피해달라거나 혹은 공황을 일으키는 환자들에게 주의를 주는 문구들을 간혹 볼 수 있다. 빛이나 소리에 대한 감각적 자극 때문이다. 누가 보아도 화려함을 넘어선 눈부심이 있고 누가 들어도 집에 가는 길에 이명에 시달릴 정도라면 그 자극은 원하는 사람만 느끼게 하는 것이 맞다. 문제는 원하지 않든 원하든, 그게 감각적인 것이든 심리적인 것이든 작품이 '폭력성'을 내재하게 될 때이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폭력성을 작품 안에 담았다면 그야말로 어떠한 대상을-이 경우에는, 폭력성을- 예술로써 풀어낸 '작업' 중 하나이다. 그러나, 다른 어떤 것을 예술로 표현할 때 생기지 않는 문제가 오로지 폭력성에서만 생길 수 있다. 그것은, 폭력은, 다른 것과 달리 가해자 입장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 입장에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어떤 사람이 어떤 의도도 없이 한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느끼게 했다면 그건 명백한 폭력이다. 개개인이 느끼는 폭력성도 너무 다르고, 결코 그 기준을 가볍게 정의 내릴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어떤 사람이 폭력이라 생각한다면-피해자의 입장에서- 그것은 타인이 뭐라 설명하고 설득시켜도 폭력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폭력은 주관적이며, 행위를 한 사람이 주체가 되지 않고 그걸 지각하고 인지하고 느끼는 사람이 주체가 된다. 굉장히 아이러니하지만, 폭력은 그러하다.


    어떤 연주회에 가거나 공연장에 가거나 혹은 어떤 작품을 봤을 때, 누군가가 폭력성을 느낀다면 그건 명백한 폭력이다. 누군가가 폭력을 느꼈다면, 그 사람은 또 다른 폭력으로 맞받아 칠 수 있다. 그것이 현재를 벗어나기 위한 행동이었다면, 그 또 다른 폭력은 정당방위를 추가해 행사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그것이 또다른 폭력이 될 것인지는 그 상대방만이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결국 폭력성이라는 것은 피해자만이 느끼는 일이기 때문에 지극히 개인적일 수 밖에 없다. 단 한명이라도 어떤 상황에서 폭력성을 느꼈다면, 그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자신의 억눌림을 표현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굉장히 개인적이고 일반적인 폭력성이지만 이 폭력성이 악화되어, 권력과 억압에 악용되는 경우가 있다. 세가지의 예시를 들려고 한다.

    Johannes Kreidler 가 Wittener Tage für neue Kammermusik 에서 발표했던 Shutter piece (http://www.kreidler-net.de/english/works/shutter.htm) 그 첫번째. 두번째는 Daniel Kötter 와 Hannes Seidle 의 연작 시리즈 Recht-Kredit (http://www.hannesseidl.de)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2017년 Donaueschinger Musiktage 에서 논란이 되었던 Bill Dietz의 공연 도중의 퍼포먼스다. 


    첫번째 작품은 제목에서 보이는 것처럼 축구와 관련이 있는데 작품 초반에 좌우 대비가 뚜렷하게 보였다. 음악과 축구, 아날로그와 디지털, 피아노와 포르테, 어두움과 밝음. 당장 무대에서 사람들이 연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이 의도된 작품임을 알면서도 자극적인 축구 골 동영상에 시선이 쏠렸다. 관중의 시선을 어딘가로 모을 수 있는 작품 안에서의 의도는 그 누구보다도 사람의 심리과 감각에 대해서 잘 아는 듯 했다. 그 이후에 연주자들로 시선이 옮겨진 이후의 작품은 혼란을 야기시키는 부분도 있지만, 작품의 의도를 분명하게 따라갈 수 있는 것처럼 곡을 썼다. 같은 음악가로서 누군가에게 음악적으로 끌려가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지만-청중은, 또 다른 하나의 주체다. 결코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아이디어 하나에 생각을 많이 하게 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곡이 다 끝나고 나서 청중에서 이어진, 규칙적인 비난의 야유-'boo'-는 많은 사람들에게 의문을 자아냈다. 과연 연주가 끝나고 박수가 나올 때의 야유조차 작곡가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해야했나 싶을 정도였다. 물론, 곡의 시작과 끝에 대한 고정관념을 다시 한번 깨어주는 계기가 되었고-작곡가가 의도했든 안 했든-, 그로 인한 많은 논쟁이 오갈 수 있는 자극이 되었다. 그러나 곡이 끝나고 박수가 나갈 때 많은 청중은, 본인이 작품에 끌려다녔다가 거기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 순간 다시금 족쇄가 채워졌다 느꼈다. 그 순간 꽤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자유를 침범 당했다고 느꼈다. 일종의 폭력이었다. 자유를 침범당한 듯한.


    두번째 작품은 라이브로 볼 때 그야말로 분함을 느끼게 했다. 같은 예술가로서 시간의 구조를 어떻게 저렇게 치밀하게 쓸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수많은 요소를 한 시간 안에 넣어놓았지만 청각과 시각 두 부분에서 청중을 장악했다. 첫번째 작품과 현저하게 다른 한가지 점은, Kreidler 작품은 의도적으로 청중의 시선을 앗아갔다면 Seidl 작품은 무대에서 일어나는 일이 결코 청중에게 보여지지 않았다. 즉, 무대에서 연주자들과 비디오 작품이 공연되고 있는 상황인데, 청중은 고려되지 않은 것마냥, 그러나 우리는 그저 보고 있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일종의 안락함이었다. 관람하는 입장에서-주체적으로 공연에 '참석'하고 있지만- 수동적으로 만들지도 않았고, 우리는 여기서 공연합니다, 관심이 있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즐겨주세요라는 마인드조차 없는 것처럼, 자신을 보여주고 과시하고 싶다는 느낌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 

    분함과 충격이 계속 된 건, 연주회가 다 끝나고 공연장을 나설 때였다. 작품 내내 등장하던 빨간 노트를 프린트해서 공연장 출구에서 누군가 나눠줄 때였다. 작품 내내 무대 위에서 청중과 상관없이 자신의 모습을 자연적으로 노출했던 사람이 관객에게 무대가 끝나고 인사를 하는 기분이었다. 정반대다. 보통은 관객이 무대에 서는 사람에게 인사를 하는데, 이건, 거꾸로 된 느낌이었다. 물론 그 또한 일종의 권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쾌함이 없이 프린트 된 빨간 노트를 받고 공연장에서 나왔다. 되려, 자신의 카리스마를 감추면 감출수록 더 많이 보여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세번째 퍼포먼스는 2017년 도나우에징엔에서 가장 이슈가 되었던 부분이 아닌가 싶다. 페스티발 도중에(마지막 공연 때는 심지어 반발이 심해서 계획했던 퍼포먼스를 다 하지 못했다고 들었다) 공연마다 객석에서 일어나고, 무대에 올라가 지휘자의 악보를 건드리고 야유를 하는가 하면, 뒤돌아 서있고 관객의 시야를 방해하는 일이 일어났다. 현직 페스티발 최고 책임자 Björn Gottstein 이 허가한 일이었다. 고정관념을 깨는 방식으로서 시도 자체가 부정적이기만 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분명 그 퍼포먼스를 보고 여러가지 생각을 관객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SWR 오케스트라가 합병을 앞두고, 거기에 반하는 시위로 Kreidler 가 무대 위에 올라와서 바이올린과 첼로의 줄을 하나씩 묶어 무대 위에서 부순 행위를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합병에 반하는 서명운동에 동참했다. 물론 그 뒤에, 퍼포먼스가 이뤄진다는 걸 몰랐던 현악연주자 한명이 기절을 했는지 기절 직전까지 갔는지 여하튼 큰 충격으로 쇼크를 받아 그 이야기까지 전해질 정도였지만.

    그러나 Bill Dietz와 Björn Gottstein의 합작(!)에서 한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다. 책임자만 그 공연의 실행여부를 알고 있었지 작곡가들에게는 단 하나도 통보된 사실이 없었다-건너건너 알고 있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지휘자나 작곡자나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직접 가서 물어봤을 정도니까, 알고 있었냐고-. 그 뿐만이 아니다. 퍼포먼스에게 야유룰 퍼부을 정도로 관객은 화를 냈고, 그 화는 공연을 보겠다고 온(그 퍼포먼스가 아닌 다른 공연) 다른 사람의 선택과 그에 지불한 돈에 합당하지 못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관객은 결코 그 퍼포먼스를 보러 온 것이 아니었고, 예기치 못한 공연 안에서의 공연은 돈을 내고 그 연주를 보겠다고 온 관객을 기만하는 일이 되어버렸고 그로 인한 불쾌감은 야유로 표현하는 수 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특히 공연 도중 지휘자 옆에 가서 악보를 넘겨버리는 행위는, 누가봐도 폭력이 될 것 같은 '객관적' 폭력이 되었다. 그러게 관객이 지불하며 기대했던 공연의 가치는 공연 안의 또 다른 공연으로 무너졌고, 그로 인해 보호되지 못한 관객의 경제적 가치는 화로써 표현되었다. 환불을 요청해도 될만큼. 여기서의 또다른 문제는 그 행위 자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위에 합작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Gottstein이 총 책임자로서 '허가'했기 때문이다. 본인의 이름으로 내어준 작품 위촉 안에 작곡가 몰래 또 다른 작품을 위촉했다. 엄연히 자유에 대한 침범이며, 권력의 과시였다. 총 책임자로서만 가질 수 있는 권력과 그의 과시. 이 퍼포먼스에서 가장 폭력을 행사하고 권력을 과시한 것은 그였다. 분명 그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느낄 정도로.


    이러한 폭력성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그 폭력성을 느낀 이후는 이미 병이 쏟아진 이후여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나 돌이킬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병을 위안 삼아 다시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은 일이 일어난 이후에 새롭게 오는 또 다른 일일 뿐이다.

    피해자의 입장에서만 판단할 수 있는 폭력이라는 것은, 가해자가 되는 입장에서 의도할 수 없다. 현대예술 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사회 안에서 서로 주고 받는 입장에 살아가기 때문에 조심할 수는 있어도 완벽할 수는 없다. 이렇게 저렇게 끼워맞춰 나아가는 것이 답일 뿐.


    다만, 내가 예술가라면, 책임자라면,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내 안에서 쌓여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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